*시대 : 대한제국
*문화재지정번호 : 사적 제289호
*소재지 : 목포시 영산로29번길 6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이 건물은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8년 10월 목포일본영사관이 목포에 설치됨에 따라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만호청(1895년 폐진된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였고,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목포일본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우편국 등을 함께 마련하였다.
이후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사용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구)목포일본영사관, 1990년 1월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후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하였다.
< 전쟁준비의 흔적. 방공호 >
근대역사관1관 뒤로는 일본이 전쟁준비를 한 흔적을 살펴볼수 있는 방공호가 있다.
<관람요금>
일반 : 어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초등학생 500원/ 유치원생 무료
단체 : 어른 1,500원/청소년 및 군인 700원/초등학생 500원/유치원생 무료
- 목포시민에 한해 관람료 50% 감면 및 목포 관내 초등학생 이하 무료
- 단체는 20명 이상
*시대 : 일제강점기
*문화재지정번호 : 시도기념물 제 174호
*소재지 : 목포시 번화로 16
목포근대역사관 제2관은 근세 서양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척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 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척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척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관람료 : 무 료>
*시대 : 일제강점기
*문화재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 30호
*소재지 : 목포시 영산로10번길 10
1929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목포에 처음으로 설립한 심상소학교의 강당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앞쪽과 양쪽 면은 두 가지 색깔의 타일로 마감하였으며, 2층에는 폭이 좁은 아치창을 두었다.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제 강점기의 초등학교 건물로 당시 강당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한 일제강점기의 초등학교 건물로 당시 일본인 거주 지역에 위치하였다.
최근까지 과학관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복원 과정중에 있다.
*시대 : 조선
*문화재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137호
*소재지 : 목포시 만호동 1-56번지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鎭營)이며 목포영·목포대라고 불렀고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과 경상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목포는 조선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1439년 (세종21년) 처음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 되었으며, 성의 모습이 갖추어 진것은 1502 (연산군 8년)으로 전해진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둘레 1,306척, 높이 7척 34촌이었으며,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그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 (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 되었다.
만호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세종 21년(1439년 4월 15일) 의정부가 무안 현의 목포는 왜적침입의 요해처이므로 만호를 파견하고 병선을 주둔토록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것이 목포만호진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현재의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城)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어간임이 밝혀지며 당시 중지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진 직후인 개항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 일본영사관 또는 역국사관 기지로 사용 되다 훼손되어 목포진 유적비만이 남아있던 곳을 2014년 현재의 모습으로 일부 복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던 군사기지가 120여년만에 역사공원으로 복원돼 역사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대 : 현대
*문화재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 22호
*소재지 : 목포시 해안로 165번길 33
<수호성인 : 성 골룸바노>
<레지오마리애의 도입>
레지오마리애는 교회가 공인한 신자단체로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에 끊임없이 대적하는 교회의 싸움에 적극 참여하기 위하여 형성된 집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 5월31일 목포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